in Campus Herald 90호(2008. 2. 4 ~ 2008. 2. 17), 대한민국 헤럴드 미디어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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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내 청춘에게 고함>
우리의 더딘 발걸음조차 아름다운 이유
영화가 끝날 때쯤 인호는 관객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그냥 여기서 이렇게 멈출래요?" 그러니 인호 자신도 결국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이 영화의 영어 제목처럼 'Don't Look Back'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청춘이라는 단어는 봄 같은 젊음, 그리고 그 파릇파릇함을 의미한다. 사회생활의 시작 앞에서 젊다는 패기 하나로 전진하는 그들을 보며 우리는 청춘의 아름다움을 논하곤 한다. 그러나 그 청춘 시절이 꼭 앞을 향한 힘찬 발걸음만으로 구성되지는 않는다. 영화 '내 청춘에게 고함'은 위와는 다르게 더딘 발걸음을 옮기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3가지의 다른 주인공의 삶을 통해 많은 청년들이 겪는 여러 가지 방황을 실험적으로 다루고 있다. 영화가 처음 부분에서 남자친구와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가정불화로 인한 아픔을 겪는 한 여인의 방황을, 두 번째로 비도덕적으로 알게 된 한 여자를 사랑하며, 자신의 직장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고 안타까워하는 남성을 이야기했다면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아내와의 믿음이 깨져버리고, 앞으로의 자신이 겪을 미래마저 불투명한 말년병장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러한 주인공들의 방황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방황이 일어난 이유는 좁혀 본다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단칼에 잘라버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기 때문이다. 끊지 못하고 질질 끌어버리는 사이에 사람은 아픔을 겪고 끝내 방황이라는 악수를 선택하고 만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정희가 조금만 먼저 아버지에게 다가갔다면 아버지의 자살을 확인하진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근우가 조금만 빨리 단자에서 손을 뗐더라면 상황은 다르게 진행됐을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 인호가 좀 더 일찍 아내를 챙겼다면 마지막 내장산행 기차여행은 즐겁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다른 세 가지 상황은 결국 시간이라는 요소 앞에 묶이고 만다. 영화에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라디오 뉴스는 어쩌면 전혀 다를 각각의 이야기를 같은 스크린 속으로 연결해주며 비슷한 기찻길, 비슷한 상황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방황을 보다 입체적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한다. 인호가 사용하는 공중전화를 철거하는 것이 근우의 직업이고, 근우가 목격했던 불륜은 인호의 삶에서는 실제가 된다. 정희가 책에서 돈을 찾듯 인호도 잡지에서 돈을 찾아 주머니에 꼬깃꼬깃 넣는다. 이런 방법을 통해 이 영화는 끊임없이 이 방황이 다른 곳에서 돌고 돌면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감독은 청춘의 방황이 어느 한 곳에만, 어느 한 사람만이 겪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모든 이의 삶의 일부라는 것을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설명해주고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확실한 결말을 내리지 못하고 흐지부지하게 사건을 끝내고 있다. 무모하게 청춘을 믿고 시작한 그들이지만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그들은 언제나 약자일 수밖에 없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며 세상에 불만을 호소하지만 현실과의 타협을 통해 그들이 겪었던 방황의 끝은 아무도 보지 못한 채로 이야기는 끝나고 만다. 결국 주인공은 기찻길처럼 만나지 못할 평행선 위를 걷고 있는 지도 모른다.
god의 노래인 '길'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어릴 때부터 이 질문에 답하려고 했던 나는 지금도 답할 수 없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불확실한 미래가 있는 한 방황은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방황을 통해 우리 모두는 약간씩 자라고, 아름답게 철이 들지도 모른다.
청춘은 봄 같은 젊음, 그 파릇파릇함을 의미한다. 젊다는 패기 하나로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청춘의 아름다움을 논하곤 한다. 그러나 그 청춘 시절이 꼭 앞을 향한 힘찬 발걸음만으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영화 ‘내 청춘에게 고함’은 위와는 다르게 더딘 발걸음을 옮기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세 주인공의 서로 다른 삶을 통해 많은 청년들이 겪는 방황을 실험적으로 다루고 있다. 영화의 첫 번째 방황은 불안정한 사랑과 가정불화로 인한 아픔, 두 번째 방황은 엇나간 사랑과 직장해고로 인한 아픔, 세 번째는 아내와의 불화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방황하는 말년병장의 이야기다.
주인공들의 방황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방황의 이유는 공통적이다. 열정은 있으나 그 뜨거움을 잘 다루지 못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혼란함, 바로 그 청춘의 본질 때문이다.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는 사이 때로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이 일어나기도 한다. 머뭇거리는 사이 아버지의 죽음을 맞게 된 정희, 집착이라는 방식으로 사랑을 엇나가게 표현하는 근우, 무기력함과 회의에서 허우적대다 다시 다가갔지만 돌이키기에 늦었음을 확인하고 쓸쓸히 여행을 떠나는 인호. 이들의 방황을 보고 있노라면 ‘좀 더 서둘렀더라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방황은 청춘의 불가피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영화 전반에 등장하는 라디오 뉴스는 각자 다른 방황을 걷고 있는 이들을 묶어주고, 같은 장소에 다른 아픔을 안고 지나치는 이들의 방황은 서로가 느끼지 못하는 채 마주치고 얽히기도 한다. 인호가 붙들었던 공중전화를 철거하는 것이 근우의 직업이고, 근우가 목격한 불륜은 인호의 방황 그 자체다. 정희가 책 사이에서 돈을 찾고 인호는 잡지에서 돈을 찾아 꼬깃꼬깃 넣고 또 어디론가 향한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여러 곳에서 다른 아픔을 앓는 청춘의 방황이 계속되고 있음을 환기시킨다.
영화는 방황이 청춘에게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삶의 일부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열정을 믿고 무모하게 나가 보지만 현실의 벽에 화를 내고 불만을 토로하고 그러다 무력함을 느끼고 타협과 물러남, 다시 일어남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들의 방황은 끝을 맺지 못한 채로 이야기는 끝난다.
god의 노래인 ‘길’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그 질문에 대답해 보려 꽤 오랜 시간 생각해 왔던 나는 아직도 답을 할 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 한 방황은 필연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방황을 통해 우리는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조금씩 자라고 아름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p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