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밥바라기별
같은 시대의 기억
누구든지 내 나이쯤 되고보면 각자 겪은 인생 사정으로 많은 추억이 있기 마련인데, 몇 달이나 몇 년에 걸친 체험과 기억이 있는가하면 그야말로 몇 분 또는 몇 시간에 불과한 ‘만남’ 또는 ‘스쳐감’의 기억들이 가슴 깊숙한 곳에 남아있다. 그리고 불교의 상식적인 말들 중에 인연, 업보, 카르마 등등의 말이 제법 맞아 돌아간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를테면 전쟁과 관련된 기억과 인연만 돌아보아도 줄줄이 이어져서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게 될것만 같다. 우리 식구는 해방이 되자마자 만주에서부터 피난을 시작하여 외가인 평양을 거쳐서 서울로 월남을 했다. 그래서는 영등포에 정착을 했었는데 육이오 전쟁 중에는 대부분의 서울 시민들이 그랬듯이 미쳐 피난가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1989년에 방북했을 때에 북의 시인이며 작가동맹의 부위원장이던 최영화 선생과 술자리에서 우연히 서로의 기억을 맞추어 보았던 적이 있었다. 그는 바로 전쟁 중에 보도요원겸 선무 공작원으로 영등포에 머물러 있었다. 한달쯤 뒤에 그는 청주까지 내려갔다가 전시의 학교 복귀령에 따라 복학을 했다고 한다. 나는 그해 7월 우리 동네 아이들과 역전에 들어왔다는 탱크를 구경하러 갔던 적이 있었다. 내가 그때를 기억하는 것은 아이들이 처음으로 탱크에 올라가 포탑 안의 조종석에도 앉아보고 어린 병사들에게서 건빵도 얻어 먹었기 때문이다. 아니 무엇보다도 바로 때 맞추어 미군기의 공습경보 때문에 뚜껑을 닫고 전투태세에 들어간 탱크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아이들은 오줌을 지릴 정도로 혼찌검이 났다. 경보가 해제된 뒤에 우리는 이미 겁이 없어진채로 탱크에 올라앉아 사진을 박았다. 그 사진을 박은 사람이 최영화 시인이었다고 하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한가지만 더 얘기하자면 평양백화점을 방문했다가 부지배인 노인을 만났던 일이 있었다. 옛날투의 사투리 비슷한 서울 말을 쓰길래 내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고 그는 문밖 영등포에서 대대로 살았다고 대답했다. 전에는 경성 시내는 ‘문안’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서로 살던 곳을 짚어보니 한길 하나 사이였다. 우리 동네는 아니었지만 이웃 동네인 셈이었다. 서로가 떠난지 오래된 곳에 대하여 얘기하는 중에 우리는 나이 차가 있었지만 공유하고 있는 추억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을 지나 만주 안동선까지 닿는 증기기관차의 기관사였고 그도 부기사를 거쳐서 기관사가 되었다. 우리 동네서 멀지않은 곳에 경성철도의 영등포 공작창이 있었다. 그래서 새벽녘에 수리나 점검을 하러 들어오던 기관차가 내뿜는 증기와 기적 소리에 잠이 깨곤 했다. 만두를 팔러 다니던 고학생협회 소년들의 얼어붙은 ‘만쥬나 호야호오’하던 목청 소리도 생각이 났고 여의도 비행장에서 연습기들이 아침 시동을 거는 프로펠러 소리도 우리는 생각해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서로 고함을 치듯 반가워했던 것은 길 건너 초등학교에 불이 나서 변소까지 홀랑 타버렸을 때의 기억이었다. 변소의 오물이 끓어서 온 동네에 고약한 냄새가 며칠동안 가시지 않았고 밥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십대이던 아들과 함께 전쟁 중에 북으로 갔고 그의 아들은 기관사 조수로 보급열차를 몰다가 낙동강 전선의 어느 철길에서 미군기의 공습으로 폭사했다. 내가 언젠가 이들 삼대의 얘기를 써보겠노라 하는 것은 내 ‘추억’ 때문이기도 하다.
베트남의 작가로 ‘전쟁의 슬픔’을 쓴 바오닌이라는 친구가 있다. 벌써 다섯해 전의 일이 되었지만 그와 나는 어느 시사주간지의 기획으로 대담을 했다. 나는 베트남 참전 병사 출신으로 당연히 그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했고 그는 겸양하며 받아들였다. 당시에 나는 늦게 군에 갔던 탓으로 스물 네 살의 병사였고 바오닌은 십칠세의 월맹군 소년병이었다. 그리고 말을 맞추어 보다가 그가 플레이쿠에서 후에 호이안에 이르는 전선까지 종군했다는 것과 그와 내가 1968년 구정 공세 때에 어쩌면 서로 총부리를 맞대었던 적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후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내가 하노이를 답방하면서 우정은 더욱 돈독해졌다. 나의 부끄러움과 회한은 ‘무기의 그늘’에서 전쟁의 주체가 결국은 베트남 민중이었음을 밝히고 있지만, 그는 전쟁에서 자신들이 상실한 것들을 아프게 추억하고 있다. 그와 나의 책들은 지금 서구 나라의 책방에 나란히 꽂혀있다.
비슷한 또래인 프랑스 작가 르끌레지오는 같은 해인 1968년에 태국의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의사로 평생을 보낸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서구 제국주의를 증오했다. 마침 알제리의 독립 투쟁으로 프랑스 청년들은 징집되어 식민지 전장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징병에 응하지 않고 이른바 공익근무를 자원하게 되었단다. 그는 알제리는 피할 수 있었지만 또 하나의 식민지 전쟁이었던 베트남을 바로 이웃에 두고 보면서 부채감으로 괴로워했다.
내 또 다른 친구들인 독일 작가 한스 크리스토프 부흐와 조각가 요헨 힐트만은 그해에 베트남전 반대운동으로 학교를 그만두거나 해직되었다. 특히 한스는 그로부터 평생을 라틴 아메리카, 르완다, 남아프리카,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등지를 찾아다니며 유럽과 미국이 저지른 참극의 원죄를 목격하게 된다.
일본의 작가 오타 마코도는 그 해에 미군 탈영병을 제3국으로 피난시키는 일에 분주해 있었다. 지금은 캐나다에 살고있는 그 병사는 한국전쟁 고아로 미국에 입양 되었던 기구한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나중에 방북하고나서 베를린을 거쳐서 뉴욕에 망명하고 있던 시절, 서쪽 끝인 로스앤젤레스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상대는 서투른 외국어 투의 한국말로 ‘무기의 그늘’을 번역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한국전쟁은 즉 베트남전쟁입니다’. 나중에 몇 번 통화가 오가고나서 그는 자기를 밝혔다. 자기 어머니가 해방공간의 저 유명한 이강국의 애인이며 여간첩으로 처형된 김수임이라는 것이다. 그는 바로 김수임과 문제의 미군 헌병사령관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뒤 고등학생 때까지 외할머니가 기르다가 미국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나는 그의 쓸쓸한 목소리와 마음만을 전해 들었고 끝내 만나지는 못했다.
"글은 어떻게 쓰는가?"
글쎄, 소설 쓰기에 대한 특별한 방법이나 지름길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현재 한국의'예술교육'에 대해서 그리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다.
요즈음 각 대학마다 전국적으로 문예창작과가 많이 생겼는데, 문인들에게는 일자리가 많이 생겨서 좋은 점이 있겠지만 젊은 작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 기발한 생각과 상상력을 가진 신인을 배출하는 데엔 오히려 장애 요인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구성이며 문장이며 발상이 모두 무난한 수준에 오른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출품되는 근년의 현상 응모작들의 경향에서 나는 그러한 추세를 보게 된다.
이야기가 잠깐 옆길로 새지만, 지난 70년대의 어느 날, 내가 가난한 단칸 셋방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던 때였다. 지금은 건축가와 미술평론가로 늙어가는 친구들이 밤새 술길을 따라 돌아다니다 우리 집에서 함께 자고 일어난 아침이었다. 느지막히 콩나물국에 해장을 하고 늘어져서 잡담을 하던 중이었다.
한 친구가 집안에 굴러다니던 헌 청소년 잡지를 들쳐보다가 감탄을 했다. 잡지 맨 뒤에 실린 독자 만화 투고란의 어느 그림을 보라는 것이었다. 한국과 해외의 기성만화가들의 장면을 모사한 그림들 틈에 색다른 것이 끼여 있었다.
'내 동생들'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시골식 툇마루와 격자 창문 앞에 세 아이가 서있는 장면이었다. 가운데 머리를 박박 깎은 열 살 쯤의 소년이 섰고 좌우에 여섯 살, 네 살, 정도의 계집아이 둘이 서있었다. 아이들은 눈부신 햇빛 때문인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는데 오른쪽의 좀 더 큰 여자 아이는 나비처럼 생긴 플라스틱 머리핀을 꽂았고 왼쪽 작은 아이는 치깎은 단발머리에 한 손은 오빠의 바지자락을 움켜쥐고 서있었다. 작은 아이가 오빠의 바지자락을 꼭 움켜쥔 것은 넘어지지 않고 똑바로 서있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이들의 플라스틱 머리핀과 손가락의 '실감'이 아직도 나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림을 투고했던 어린 그림쟁이가 아래쪽에 주소를 남겼는데 무슨 군, 무슨 면, 무슨 리, 아무개 15세라고 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제각기 어느 학교 몇 학년 몇 반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이 그림의 주인공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그 어린 화가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는 천재다, 학교에 보내 주어야 한다, 아니면 그림물감이라도 보내주어야 한다, 이 아이는 기필코 좋은 예능교육을 받아야 한다, 등등. 그러다가 우리의 논의는 무력하게 잠잠해지기 시작한다. 숨겨져 있는 재능이야 그렇다치더라도 하다못해 동네마다 있는 미술학원 그리고 미술대학에서 우리는 얼마나 수많은 재능의 가능성들을 망쳐왔는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아이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그가 절대로 화가가 될 수 없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리라. 그리하여 우리의 결론은 '모든 예술가는 당대 대중의 수많은 재능의 시체 위에 서있다'라고 내려졌다.
나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숨은 재능이 있고 누군가 그런 점을 발견하여 글 쓰기면 글을 쓰게, 그림을 그리면 그리도록 조금만 도와주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기초는 스스로의 소양에 의하여 쌓이기 마련이고 그 뒤에는 젊은 예술가 지망생의 자생적인 노력에 의하여 형성될 것이다. 기초는 물론 첫째로 독서가 되겠다. 문학 책도 많이 읽어야 하겠지만 문학뿐만 아니라 이른바 예전부터 일렀듯이 문(文), 사(史), 철(哲), 분야의 책들을 폭넓게 읽되 동서양 고전을 읽으면 그 기초가 튼튼해진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식견이 서게되면 근대와 현재의 기원을 해부한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을 읽어야 한다. 이른바 교양인의 기초를 세우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작가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폭넓은 체험과 상상력이다.
국내에서도 그렇지만 해외의 낭독이나 토론 같은 문학행사에 참가하다 보면 대개는 청중석에서 빠지지않고 나오는 질문이 한가지 있다. '글을 어떻게 쓰는가'라는 질문이다. 리용에서 세계 중견작가 포럼이 있었다. 역시 글을 어떻게 쓰는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옆자리의 어느 프랑스 인기 여성작가는 내면과의 피투성이의 싸움에 대하여 심각하게 토로하고, 미국의 어느 작가는 이 질문이 자기에게는 아직도 가장 어려운 질문이라면서 알콜 중독이던 어머니를 재우고 혼자 놀던 유년시절이며 보호소 얘기로 대신한다. 나는 간단하게 대답하곤 한다.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 다시 물으면, 손이 쓴다, 또는 궁둥이가 쓴다고 대답한다. 글을 쓰는 일은 세상 사람들이 사무실이나 일터에 나가서 일하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다. 즉 노동이 글 쓰기의 본질적 측면이라는 것이다. 나는 직업작가로서 원고료를 받고 수공업적인 노동을 통하여 작품을 제조해내고 그것으로 먹고 산다.
글 쓰는 행위의 특수성을 강조하거나 그것의 어떤 고상한 정신의 무보상적 성질을 얘기하는 것은 위선이다.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농업의 자급적 상태에서 수공업적 공장제로 넘어가던 시기에 시장의 형성과 더불어 음유시인에서 이야기꾼으로 그리고 활자 매체를 통하여 인쇄된 책이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제품이었다.
다만 나는 여기에 무엇인가 덧붙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동양에서는 공자 이래로 식자(책 읽은 사람)는 자기가 배운 것을 가족 사회 공동체에 되돌려줄 책임이 있다고 말해왔다.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 이래로 지식인의 역할은 비판적 기능이다. 그러므로 인문적인 것과 상관 관계에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은 사람끼리의 관계의 과정에 대한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의사, 율사, 교사, 종교인, 작가도 그런 이들 중의 하나다. 나는 그런 최소한 사람끼리의 관계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을 직업윤리라고나 말해 둔다. 농담 삼아서 내 문학의 직업 윤리란 무엇인가 자문해 본다. 그것을 우스개 삼아(엄숙한 것은 옛날부터 딱 질색이니까) 인, 해, 문, 이라고 말한다. 즉 풀어서 얘기하자면 '인생해방문학'쯤 될것이다.
나는 거의 난독이라 할 정도로 책을 많이 읽었다. 그것은 우리 세대에 다른 문화나 오락꺼리가 없었고 운이 좋게도 내가 인문교육을 가족의 사명으로 알고 세대를 이어 물려준 전통을 가졌던 사회에서 성장한 덕도 보았다. 우리는 동아시아에서도 구석에 위치한 작은 나라였지만 스스로를 지키고 생존해 가기 위해서도 바깥 세상을 잘 알아야 했고 내부에서는 그때마다 가치를 세워 두어야 했다. 비관적이나 오히려 반대로 얘기하는 이들도 많지만 여러가지 역사적 정황을 따져 보자면 대단한 데가 있다.
금속활자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명하여 인쇄술을 발전시켰다거나 하는데 이는 미디어에 대한 특출한 소질이다. 현재 한국은 인구 수에 비해서도 그렇고 국토의 크기에 비해서도 그렇지만 세계에서 출판 7위이다. 도서출판의 거의 절반이 아동도서인데 전쟁 직후에 폐허가 되어버린 상태에서도 출판은 지속되었으며 어릴 때 어머니에게 책을 사달라고 하면 그 가난 속에서도 기꺼이 돈을 주었다. 이러한 사정은 지금도 비슷하다. 한국의 어머니는 책을 사달라는 아이를 절대로 꾸짖지 않는다.
동아시아만 사정을 놓고 보더라도 일본은 80년대 제2차 신경기의 시절에 자본주의 사회의 풍요를 구가하면서도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본격문학은 자폐되고 말았다. 그리고 중국은 노신 이래 현대문학이 사회주의 체제의 엄격한 검열에 갇힌 채 가능한 상상력들이 차단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현대문학은 전쟁과 독재와 온갖 사회적 억압의 질곡을 뚫고 그야말로 다양하고 힘있는 서사의 바탕 위에서 창작되고 있는 중이다. 내가 스스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서구문학은 그 형식적인 면에서 여러가지 활로를 모색 중에 있지만 서사 자체는 우리에 비하면 맥아리가 없다. 우리 경우에 젊은 작가들은 형식적 탐구나 실험 정신은 충분한데 서사가 아직 약하다는 말을 듣는다. 한반도의 우여곡절 많은 삶 속에 널려있는 서사를 체험과 상상력을 통하여 자기 것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강점이 될 것이다.
언젠가 내가 '문학에 뜻을 둔 아우에게'라는 산문을 쓴 적이 있는데 거기 이런 글이 나온다.
'문학'이 사랑하는 연인이라면 두 팔로 끌어안고 얼굴을 맞대고 들여다보고 있을 게 아니라 차라리 그녀를 떠나서 너는 너대로 살아라. 그래서는 열심히 진정으로 너의 생을 살다보면 어느 결에 성숙해진 그녀가 네 등뒤에 다가와 너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릴 것이다. 나 아직도 네 곁에 서서 멀리가지 않고 지키고 있었어, 라고.
3월 9일 밤에. 황석영
'Miscellaneou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죄추정의 원칙 (0) | 2008.03.17 |
---|---|
스킨 안정화 (0) | 2008.03.15 |
I Love You (0) | 2008.03.11 |
센스있게 댓글, 방명록 작성 부탁드려용 (0) | 2008.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