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도서정가제 덕분에 샀던 책들 중에 전혜린 에세이집을 제일 먼저 읽고 있다. 하나만 있는 줄 알았던 에세이집은 몇 가지 종류가 있었고, 범우사에서는 아직 가격이 오르지 않은 3900원 문고판 책도 나왔었단다. 이 책 덕분에 요즘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오랜만에 읽는 에세이집이라서 그럴까? 아님 이제 사후 50년이 되어가는 전혜린의 글의 힘일까? 그녀의 독일은 내가 10일동안 여행했던 독일과, 비슷하면서 달랐다. 뮌헨에서 귀찮다는 이유로 슈바빙에 가지 않았던 것은 아쉽지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그녀의 설명에 온전히 집중해서 내가 보지 못한 슈바빙을 상상할 수 있으니. 독일을 바라보는 50년 전 그녀의 시선과 지금의 나의 시선, 그리고 50년 전 슈바빙과 지금의 슈바빙은 얼마나 벌어져있을까? 아, 나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만약 20대 후반을 위한 교과서가 있었다면, 에세이 '목마른 계절'은 국어 교과서에 실렸을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나이를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지금 내 나이 29세, 그러니까 액년이다. 그러나 올해 나는 특별히 재앙이나 불행을 겪지 않고 있다. 직업이나 모든 면에서 올해는 무발전의 해였다. 꽤 미신가인 나는 올해 초부터, 소위 9자가 든 올해를 두려워 하면서 무슨 카타스프로프를 예상하고 있었으나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어느 해나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흘러 갔다. 연령의 중량도 지금 내 펜에 쓰이는 대상으로서만 비로소 내 의식의 표면에 떠오를 정도로 매우 바쁘고 피곤한 한 해였다. 생각해 보니 피로가 심했던 것이 올해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수레에 끼워진 바퀴처럼 자기 자신이나 주위에 대해 신선한 흥미를 잃고 타성처럼 회전하고 있었던 생활이 단적으로 말해서 내 1년간의 생활이었던 것 같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도대체 커다란 흥미가 없어지고 만 것 같다. 이것이 곧 내가 30대 여인으로 되어 가고 있는 징후일 것이다. 전과 비할 것 같으면 나 자신의 본질이나 현실이나 미래에 별로 강렬한 호기심이 안 일어나고 말하자면 일종의 자기에 대한 권태기-어느 정도의 포만과 반복이 어떤 일에 있어서도 갖다 주는 탄력 상실의 시대……. 이러한 징후는 확실히 이미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나이를 잊고 사는 생활, 바쁜 일과로 찬 직업 생활, 비교적 안정된 가정 생활, 자기에 대한 호기심의 고갈, 미래에 대한 강렬한 흥미의 결여, 과거에 대한 냉담과 비감상주의……. 이런 여러 가지 징후가 30대라는 선의 전후로 여자에게 수반되는 보편적인 만성의 징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이 어떤 정상적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든지 한번은 모두 겪는 단계일 것이다. 어렸을 때는 우리에게는 마치 어느 가능성으로든지 길은 다 열려 있는 것처럼, 세계는 커 보였고 중요했고 자기 자신이 신비스러웠다. 매일매일의 생활이 마치 그림이 잔뜩 들어 있는 그림책같이 수수께끼와 신선한 흥미에 넘쳐 있었고 싫증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도 사는 것이 신비했고 재미있었다. 공부도 책 읽는 것도……. 모든 것이 여학교에 들어오면서 세계는 조금씩 좁아져 갔다. 시야가 한계를 긋기 시작했다. 사유는 없는 모순감과 고뇌가 싹텄고 무서운 인식욕에 사로잡혔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었다. 파우스트처럼. 그리고 마음의 벗이 생겼다. 주혜는 폐쇄적이고 건조한 성품인 나와 반대로 조화적이고 다정하고 건전한 소녀였다. 우리는 별로 얘기는 안 했으나 늘 편지를 교환했었다. 학교에서 매일 얼굴을 대하면서도 매일 편지를 써야만 했다. 우리는 같이 공부를 했다. 노령의 한문 선생을 괴롭히고 방과 후에 같이 <논어>를 배웠고, 역사 선생님에게 따로 <삼국사기>를 배웠다. 이런 공동 인식에의 정열과 탐욕스러운 지식욕이 그때의 나와 주혜를 무섭게 굳게 맺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을 주혜와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지식의 양식>을 읽고 나서 우리는 그 속에 있는 한 구절 "나타니엘이여, 우리는 비를 받아들이자"에 감동해서 폭우 속을 우산 없이 걸어 다녔다. 이 버릇은 많이 완화된 채 아직도 나에게 남겨져 있다. 또 마르땡 뒤 가르의 <회색 노트>를 읽고는 주혜와 나는 당장에 회색 노트를 교환하기로 하여 매일 한 사람이 집에 가져가서 일기를 쓰고 다음날 그 노트를 상대방의 책상 속에 넣곤 했다. 이 노트를 우리는 몇 년이나 교환했었다. 그 당시 그 노트와 주혜는 나의 전생활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주혜도 작가를 지망하고 있었다. 재능에 대한 정당한 회의를 어린 연령과 또 열렬한 지식욕이 가려 덮고 있었다. 하늘은 넓었고 우리는 얼마든지 날 수 있다고 믿었다. 문학, 철학, 어학(영어 독어 불어 한문 한글)에 대한 광적일 정도로 열렬한 지식욕과 열성, 그리고 주혜의 모든 것을 초월한 가장 순순한 가장 관념적인 사랑으로 완전히 일관되어 있었던 나의 여학교 시절은 확실히 아직도 미래에 대해 꿈을 그릴 여백이 얼마든지 남아 있었던 동화의 나라와 현실 사이의 완충 지대이기도 했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참된 의미의 현실이 시작된 것 같다.
입학부터 내 의사가 아니었고 법률가였던 아버지의 엄명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장녀가 그렇듯이 나도 매우 부모에 의뢰하고 있고 부모를 무서워하면서 밀착하고 있는 편이었다. 또한 흔히 딸이 그렇듯 아버지를 숭배하고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버지 마음에 들고 싶다는 욕망이 의식 밑에도 또 의식표면에서도 언제나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칭찬받고 싶다는 마음이 실현되는 때마다 나는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행복했었다.
이 욕망은 아직도 내 의식 밑의 심층에 남아 있다. 아마 일생동안 나는 이런 의미로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나의 광적인 지식욕도 유전 문제는 별도로 생각하더라도 결국 아버지가 내 의식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었던 까닭에 그렇게 커다란 환희와 인내와 노력을 경주하고 수행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의식의 세계에서 나는 결국 언제나 아버지를 대상으로 지식을 쌓아 올렸던 것 같다. 마치 제단 앞에 향불을 갖다 쌓듯. 주혜는 자기가 선택한 학교에 들어갔다. 나와 주혜는 과는 달랐으나 같은 서울 대학에 들어갔다. 나는 늘 주혜의 강의실에 가서 오든이나 엘리어트 같은 시인에 관한 강의를 도강했었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법학에 대한 반감을 반추하고 있었다. 나의 재능은 다른 데 있는 것 만 같았다. 그런 1년이 지나고 우리가 대학교 2년생이 되었을 때 주혜는 뜻밖에 일가 전원과 함께 도미하게 되었다. 나는 미치게 슬펐다. 주혜는 뜨거운 여름날 가족과 함께 불행한 모습으로 그러나 새로운 생활에의 기대에 넘쳐서 비행기에 올랐다. 그날의 더위, 비행장(지금같이 포장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없는 풀밭이었다)의 우거진 풀, 먼지, 아마 일생 내 기억에서 안 떠날 것이다.
3학년을 마친 후 나는 출발했다. 남독의 대도시인 뮌헨에서 뮌헨 대학교 문리과 대학 제1학년에 입학하기 위해서였다.
반년 후에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뜻밖에 후에 나의 남편이 된 T가 뮌헨에 왔다.
어느 신혼 부부에게나 있는 두 개의 개성이 달라서 둥글어질 때까지의 마찰은 물론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젊었고 대체로 행복했다. 먹거나 입는 것보다는 책을 사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을 중시하고 좋아하는 우리의 근본적 공동 요소는 그대로 허용되고 일치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가령 수입의 반을 넘는 책 한 권을 사기를 우리는 한번도 주저해 본 일이 없다.
그대신 언제나 가난했고 가난이 우리에게는 재미있었다.
1956년 독일의 어느 잡지에 사강의 <어떤 미소>가 연재되었다. 나는 굉장히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T에게 말하면서 스토리를 얘기해 주었다. T의 주선으로 한국에서의 출판이 결정됐다. 번역이라는 일도 또 사강도 그렇게 탐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되어서 항공 편지에 작은 글씨로 번역해서 보냈고 책으로 되어 나왔다.
그 후 <안네 프랑크-한 소녀의 걸어온 길>도 그와 비슷한 경위로 아저씨네 출판사에서 책으로 되어 나왔고, 그 이후의 나의 책들은 모두 우연이 계기가 되어서 선배나 동무나 지기의 우정으로 햇빛을 보게 된 우연과 우정의 산물이었다.
내가 원동력이나 계기가 된 일은 한번도 없었고 언제나 피동적인 최근 수년간의 생활에서의 나의 근본 태도였다.
처음에 그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던 것 같은 자신과 포부, 그리고 내 운명이 내 손 안에 있다는 낙천주의 시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가 없어져 버리고 어느새 어떤 기성품의 현실이 열망됨 없이 자기에게 주어져서 그 테두리 속에 들어가 고정되어 버린 것이 나의 회고가 다시금 시인하는 결론인 것 같다.
즉 내가 미치도록 그것이 될 것을 원했던 것으로 되는 대신 자기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가장 의외의 방향으로 어느새 자기가 형성되어 버린 것을 발견한다.
크게 보아서 내가 중학교 때 썼던 글 속에 있는 한 구절 "절대로 평범해져서는 안 된다"라는 소망 겸 졸렌이라는 정반대의 사람으로 형성되어진 것 같다.
그 사실에 대해서 나는 때때로 스스로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심지어 결혼에 관해서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심연이 가로막혀 있다.
그 당시의 나는 모든 불행은 사람이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온다고 믿고 있었고 니체의 결혼에 관한 경구에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관념에 투철한 맑은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결혼이나 시민적 생활을 피해야 한다고 확신했었다.
중학교 때의 나의 글에 역설을 이루려는 듯, 나는 지금 가장 평범한 과정을 밟은 가장 평범한 직업인 아내, 어머니로서 가장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나는 내 피부 속에서 불안을 느낄 때가 있다. 좁은 껍질 속에서 감금되어 있는 정신의 중량이 확 느껴지고 파괴의 의욕을 느낄 때가 있다. 무언지 일격이 내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을 기다릴 때는 그런 때다. 이 반무의식 상태를 활짝 개인 의식 상태로 바꿔주고 이 반소망된 생활을 열렬히 소망된 생으로 만들 무엇이 하루 아침에 갑자기 나타날 것을 기다린다. 요술 지팡이를 기다리듯.
예전에는 완벽한 순간을 여러 번 맛보았다. 그 순간 때문에 우리가 긴 생을 견딜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을……
노을이 새빨갛게 타는 내 방의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운 일이 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였다. 부산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아니면 대학교 1학년 때. 아무 이유도 없었다.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울었고 그것은 아늑하고 따스한 기분이었다.
또 밤을 새고 공부하고 난 다음날 새벽에 일제히 닭이 울 때 느꼈던 생생한 환희와 야생적인 즐거움도 잊을 수 없다. 머리가 증발하는, 그리고 혀에 이끼가 돋아나고 손이 얼음같이 되는, 그리고 눈이 빛나는 환희의 순간이었다.
완벽하게 인식에 바쳐진 순간이었다. 이런 완전한 순간이 지금의 나에게는 없다. 그것을 다시 소유하고 싶다. 완전한 환희나 절망, 무엇이든지 잡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것에 의해서 뒤흔들려 보고 싶다. 뼈 속까지, 그런 순간에 대해서 갈증을 느끼고 있다.
내가 지닌 여러 가지 제한이나 껍질에 응결당함이 없이 내 몸과 내 정신을 예전과 마찬가지로 무한 속에 내던지고 싶다. 그리고 나에게 여태까지 그냥 주어지기만 했었던 생을 앞으로는 내가 의식적으로 형성하고 싶다. 내 운명에 능동적으로 작용을 가하고 보다 체계화에 힘쓰고 싶다.
서른이라는 어떤 한계선을 경계로 해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피동에서 능동의 세계로 들어가서 보다 열렬하게 일과 사람과 세계를 사랑하고 싶다. 밀폐된 내면에서의 자기 수련이 아니라 사회와 현실 속에서 옛날에 내가 가졌던 인식에의 순수와 정열을 던져놓고 싶다.